
이 글은 2010년 개봉한 영화 「부당거래」를 중심으로, 정의와 성과, 책임과 생존이 어떻게 서로를 잠식하며 ‘거래’의 언어로 바뀌어 가는지를 깊고 길게, 사람이 쓴 글처럼 숨을 고르며 풀어내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작품은 범죄 스릴러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끝까지 보고 나면 남는 감정은 통쾌함이 아니라 찝찝함이다. 악인이 누구인지보다, 왜 모두가 조금씩 선을 넘게 되었는지가 더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부당거래」는 정의가 무너지는 과정을 폭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이 얼마나 일상적이고 합리적으로 포장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영화는 시끄럽지 않은데도 오래 귀에 남는다.
성과가 필요했던 사람들, 정의가 거래되는 순간
영화 「부당거래」의 출발점은 잔혹한 사건이다. 사회는 분노하고, 언론은 몰아붙이며, 조직은 결과를 요구한다. “빨리 잡아라.” 이 말은 정의를 향한 외침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성과 압박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는다. 진실보다 중요한 것이 ‘잡았다는 사실’이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미묘하게 틀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악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밀려 있다. 승진을 앞둔 형사, 조직을 지켜야 하는 검사, 밥줄이 걸린 브로커.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야 할 이유를 갖고 있다. 영화는 이 사정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래서 관객은 불편해진다. 이 선택들이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처음부터 사람 냄새가 나는 이유는, 누군가를 단번에 악당으로 밀어 넣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묻는다. “만약 네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이 질문이 영화 내내 따라다닌다.
선의가 거래로 바뀌는 과정
「부당거래」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부당함이 단번에 폭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 번의 큰 선택이 아니라, 여러 번의 작은 타협이 쌓인다. 규정을 조금 비틀고, 절차를 조금 건너뛰고, 서로의 약점을 눈감아준다. 그때마다 명분은 충분하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영화는 이 문장이 얼마나 위험한지 집요하게 보여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권력의 언어다. 겉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말하지만, 실제로 오가는 것은 계산이다.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버릴 것인가. 이 계산은 차갑지만 비현실적이지 않다. 오히려 너무 익숙하다. 영화는 이 익숙함을 통해 관객을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가 사는 세계와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형사와 검사, 브로커의 관계는 적과 동지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든다. 필요하면 손을 잡고, 불리해지면 등을 돌린다. 이 관계의 유동성은 개인의 도덕성보다 구조의 힘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영화는 말한다. 문제는 몇몇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쁜 선택을 ‘합리화’하게 만드는 판이라고.
연출은 거칠지만 산만하지 않다. 대사는 빠르고 직설적이지만, 감정을 대신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을 가까이 잡기보다, 그들이 놓인 자리와 상황을 오래 보여준다. 이 선택 덕분에 영화는 개인의 드라마를 넘어 구조의 초상을 그려낸다.
부당거래, 아무도 깨끗하지 않은 자리에서
「부당거래」의 마지막이 찝찝한 이유는, 누군가가 완전히 패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진짜로 이기지도 않는다. 각자는 조금씩 잃고, 조금씩 살아남는다. 정의는 회복되지 않았고, 시스템은 유지된다. 이 결말은 냉정하지만 솔직하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의’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게 된다. 정의는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늘 조건을 달고 등장한다. 영화는 그 조건들이 어떻게 정의의 얼굴을 바꿔버리는지 차분히 보여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분노를 유도하기보다, 침묵을 남긴다. 부당이라는 말이 어느새 정당과 정의로 바뀌는 순간, 우리의 선택기준은 또 다시 한번 애매모호해 진다.
결국 「부당거래」는 범죄 영화가 아니라 선택의 영화다. 각자의 사정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어떤 세계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말한다. 부당한 거래는 특별한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반복하는 작은 타협에서 시작된다고. 그 불편한 진실이 이 작품을 쉽게 잊히지 않게 만든다.